스크랩2009. 8. 21. 12:35
카이스트의 한 교수님께서 쓰신 글이라는데..... 내용이 좋아서 퍼왔습니다. (출처 : 빗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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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KAIST 우정아 교수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 글에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하여, 여러분들도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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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전을 비교적 늦게 배웠다.
운전을 할 줄 몰라도, 그리 불편한 줄 모르고 살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는 차가 없이는 생활이 매우 불편하다고 하길래, 출국 직전에 급하게 면허를 딸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면허 시험을 위해서는 일단 코스 시험에 합격하고, 이후 도로 주행 시험을 봐야 했다.
운전 학원에 갔다. 시험장과 똑같이 생긴 코스가 있었다.
신호음이 울리면 출발을 하고, 빨간 신호등에는 정지선 뒤에 서고, 긴급 상황엔 비상등을 켜고, 곡선 코스를 후진으로 돌아 나오고 등등을 지나 가장 어려운 난관인 평행 주차를 하고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오면 되는 거였다.
운전 선생님은 일단 차 앞유리 바로 밖에 보이는 두 개의 검은 점을 주지시켰다.
창문 닦는 워셔액이 나오는 구멍이었는데, 이 검은 점 두개는 다른 모든 코스에도 물론이거니와 특히 평행 주차를 할 때 매우 유용했다. 도로의 흰 선이 오른쪽 유리의 몇분의 몇 지점에 보일 때까지 전진을 한 후, 오른 쪽 모서리가 오른 쪽 검은 점에 닿을 때까지 후진을 하고, 핸들을 왼쪽으로 두바퀴 반을 돌린 후...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선생님의 "공식"대로만 차를 움직이면 신기하게도 평행 주차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운전대를 생전 처음 잡아본 이후 2주일 만에 나는 면허증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면허증이 있는 것과 운전을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걸 곧 깨달았다.
내가 운전학원에서 배운 것은, "면허 시험 통과하는 법"이었을 뿐 "운전하는 법"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운전학원 밖을 나서니 친절한 검은 점 두개가 유리창 뒤에 콕 박힌 자동차는 찾을 길이 없었고, 도로변의 사정은 변화무쌍해서 핸들을 "왼쪽으로 두바퀴 반, 오른쪽으로 한바퀴" 돌리는 공식에 꼭 맞는 상황이란 전무했던 것이다. 나 혼자 달리는 시험코스에서는 주행 중 차선 변경하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았고 (물론 시험에 나오지 않으므로) 많이 굽은 도로에서는 속도 조절을 어떻게 해야할 지 등은 배울길이 없었던 것이다 (역시 시험에 나오지 않으므로).
내가 가끔 우리 학생들을 보며 떠올리는 일이다.
우리 학생들은 말하자면 코스 주행의 달인들이다.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시험에서 승승장구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말하자면 정해진 코스가 있고, 그 단계들을 통과하기 위한 공식을 모두 정확히 배우고 익혀서, 그대로 달리는 일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가. 우리는 지금 복잡하기 그지없고 넓디 넓은 도로에 나와있는데, 아직도 "코스"위에 있는 줄 아는 학생들이 많이 눈에 띈다.
여기서 직진할까요?
- ... 그냥 좀 가 보면 안되겠니?
직진하면 시험에 통과인가요? 그러면 가 보구요.
시험에 안 나오는데 차선은 왜 바꿔요?
평행주차할 건데, 핸들은 어떻게 돌릴까요?
왼쪽으로 두바퀴? 오른쪽으로 반바퀴? 그 다음은요?
그대로 돌렸는데 왜 차가 안 들어갈까요?
... 와 유사한 질문과 태도를 보이는 학생들이 은근히 많아서 가끔은 당황한다.
나는 학생들이 대로에서 자유롭게 운전하기 위한 기본적인 운전법을 가르치는 중이다. 그러려고 노력한다.
기본적인 기술을 배운 이후 내가 가보지 않은 곳까지 학생들이 헤매고 다녀왔다가 거기서 만난 풍경이 어땠는지 듣는 것도 반가울 텐데.
하지만 학생들은 가끔 코스 시험의 편리함을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대학에서도 물론 시험을 본다. 하지만 시험이라는 것은 공부를 통해 익히고 배운 것을 확인하기 위한 간략하고 나름대로 효율적인 방식일 뿐, 그것 자체가 목적은 결코 아니다.
즉 우리는 공부를 하기 위해 시험을 볼 뿐이지, 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전히 학생들은 시험을 보고 학점을 받기 위해 공부를 한다.
시험에 안 나와도, 즉 코스에 정해져 있지 않아도, 멀리 멀리 가 볼 수는 없을까?
가서 별거 없더라도, 가는 길이 힘만 들었더라도, 그 과정이 결국 뭔가를 배우는 길이 될 터이고, 그 과정이 없이는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곳을 찾아내는 기쁨도 없을 텐데 말이다.

많은 학생들이 지금은 "셔틀버스기사"에 머물러 있다. 정해진 길로만 다닌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고자 하는 용기가 없다.
안타깝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일은,
더 많은 길이 무궁무진하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른 채, 셔틀노선만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절망적이다.

정해지지 않은 길에 자유롭게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시간.
멀리 돌아서 다녀오고도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더라도 용서가 되는 시간.
여러분이 "학생"이라는 아주 짧은 동안에만 가능한 일인데도.
그 짧고 소중한 시간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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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토리군